우크라이나 선교

으리 으리한 의리

관리자 0 3,949 2017.09.04 07:07
으리 으리한 의리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요 15:14-15)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을 복음의 접촉점으로 삼았다. 우크라이나 고려인은 한인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위해 미리 예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 생각한다. 1991년 크림 반도의 땅을 처음 밟았을 때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사람들은 고려인이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던 불편함 속에 한민족이라는 동질감으로 쉽게 어울릴 수 있었고 또 시장에서 종종 만나는 고려인들의 따스한 인정이 현지 적응에 많은 도움을 주어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 주재 한국 대사관의 통계에 의하면 우크라이나의 고려인은 전국에 3만 4천명 정도이며 크림 반도 주(州)에만 약 4천명 정도 살고 있다고 한다. 크림 반도의 고려인들은 대부분 중앙 아시아(우즈벡, 카작, 타직스탄 등)로부터 이주하여 왔다. 농업에 능한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땅과 흑해 주변의 충분한 일조량을 찾아 3~4천킬로 떨어진 중앙 아시아에서 크림 반도로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다수 고려인들은 3월부터 11월까지 움막을 짓고 살며 농사 일을 한다. 주로 부부가 농업에 종사하므로 자녀 교육은 조부모가 담당하는데 선교사가 가정 방문을 하면 대부분 할머니와 아이들만 집을 지키고 있어 가정마다 자녀 교육에 어려움이 많다.

겨울이 되면 농장에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안식하는 중에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가족 행사와 잔치 등을 집집마다 앞 다투듯 치룬다. 우리 성도들도 초대 받아 다니느라 바빠 교회 출석이 때론 저조했다. 그래서 고려인들의 겨울은 오히려 농번기 보다 또 다른 바쁜 계절이다. 추수했던 돈으로 행사를 크게 치루다 보니 주류 사회가 고려인의 씀씀이를 알아 줄 정도였다.특히 노인들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주로 화투 놀이와 함께 손주를 양육해 왔는데 그 놈의 화투가 놀이를 넘어 도박으로 전략되어 다음 해 농사 준비할 돈까지 모두 잃어 가정 파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교회에서 고려인 노인들을 대상으로 신앙 교육을 할 때마다 화투 도박 금지를 강조했다. 이구동성으로 화투 도박이 나쁘다고 공감했으나 화투 이외 다른 놀이 문화가 전무했기에 삶의 변화는 쉽지 않았다. 겨울 내내 화투 대신 주일 예배와 구역 활성화를 통해 성경 공부 2부 순서로 아리랑과 민속 춤을 가르쳤다. 몸치 음치에 불과한 우리 부부가 어느새 예능 선생이 되니 노인들에게 인기였다. 그러나 실제 어느 결혼 피로연에서 사회자가 우리가 한국 노래와 춤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갑자기 무대 위로 초대했는데 그 때의 당황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고려인 문화를 공감하며 더 건강한 기독교 문화를 추구한 결과 출석하는 고려인들은 차츰 화투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고 복음을 아직 모르는 고려인들은 화투 친구를 잃었다고 오히려 선교사를 비난했다.

고려인 노인 중에 영적으로 잘 성장하고 있는 쏘냐 할머니가 계셨다. 지성적이고 차분한 쏘냐 할머니는 교회 올 때마다 깨끗하고 예쁜 옷을 입고 예배를 잘 드려 항상 눈에 띄었다. 선교사 가정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사랑이 우리에게 늘 격려가 되었고 내 생일에 양복을 선물할 정도로 우리를 좋아했다. 쏘냐 할머니는 교회에서 배운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는 모범생이었다. 특히 연초에 아들 부부가 농장으로 나가기 전 선교사를 초청하여 가족 예배를 드리는 최초의 가족이 되었다. 선교사의 기도와 축복이 그 가정에 선한 영향을 미치자 다른 고려인 가정에도 선교사 초청 가족 예배가 확산되었고 나아가 여름 철 농장으로 초대받는 심방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쏘냐 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아들 발렌틴은 해마다 드리는 가족 예배를 통해 신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 미국에서 방문한 친구 목사님의 특별전도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여 그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 왔던 할머니와 우리는 감동에 휩싸였다. 그후 발렌틴의 예배 출석은 농장 일로 쉽지 않았으나 선교사의 친구가 되어 교회 일을 잘 돕고 또 교회 행사와 무료급식 사역에 늘 자기 농산물로 헌신하였다. 쏘냐 할머니는 세상 떠날 때까지 아들 발렌틴에게 신앙 생활을 잘 하고 교회와 목사님을 잘 도와 주라고 늘 다짐을 해 두셨다.

쏘냐 할머니는 폐암 말기 투병 중에도 걸을 수 있는 한, 주일 예배를 드리는 믿음의 본을 보였고 천국을 소망하시다가 편안한 모습으로 주님 품에 안겼다. 그 후 키예프 신학교와 심페로폴 교회를 건축할 때 아들 발렌틴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기술자 친구들을 데리고 와 건축 일을 도맡아 했다. “몸을 돌보지 않고 건축 일을 왜 그렇게 열심히 했어요?’라고 물었더니 천국에 계신 어머니의 유언과 선교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했다고 했다.

지금까지 발렌틴은 나에게 유일하고 오래된 고려인 친구다. 우리의 잦은 이사 문제를 알고 나서 발렌틴은 자기 집에 새로 방을 만들어 제공하여 언제나 가방을 편히 풀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25번 이사 중에 그의 집이 제일 오래 산 집이 되었다. 그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기도해 달라고 찾아 오고 나도 그를 종종 찾아 안부를 묻는다. 선교지에서 친구의 의리는 선교 사역을 더 신나게 한다. 이 땅에서의 친구 의리가 주님 오실 때까지 또 저 천국까지 계속 이어지리라 믿는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 발렌틴이 선교사의 친구 뿐만 아니라 더 진정한 예수님의 친구가 되길 오늘도 두 손을 모은다.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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