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선교

낯선 동침

관리자 0 34 10.13 12:57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웹 5:15.16)

우크라이나에서 기차는 넓은 국토를 횡단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며 침대칸이 대부분이라 장거리 여행에 편리하다. 덜컹거리는 침대에 엎드려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 밭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해가 기울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구 소련권에서 철도의 폭은 광궤(1,520mm)를 사용하며 한국은 표준궤(1,435mm)를 사용한다. 만일 서울에서 기차로 유럽으로 간다면 러시아 국경에서 기차 바퀴를 러시아 광궤에 맞춰 바꿔야 하고, 또 유럽 국경에서 다시 표준궤로 바꿔야 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침략 위협과 독일제국의 동진을 막기 위해 정치, 외교, 국방상 철도 궤간을 유럽과 달리해 자국을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광궤를 깔았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기차는 2인용 침대칸(compartment), 4인용 그리고 한국처럼 개방된 것으로 56인용 침대로 구성되어 있다. 기차가 출발하면 승무원은 모든 승객의 표를 수령하고 매트리스와 베개의 시트 값을 받고 이를 나누어 준다. 내릴 때는 사용한 시트를 벗겨 승무원에게 반납한다. 승무원은 도착 1시간 전에 승객을 깨워주고 주문 받은 커피와 차를 방까지 배달하는 유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객차의 복도 끝에 항상 끓는 물통이 있어 장거리 여행에 귀한 컵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여유도 있다.

객차 내 화장실은 편리하게(?) 설계되었는데 변기의 발판을 누르면 오물 받이 마개 판이 열림과 동시에 물과 함께 철길에 확 뿌려진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는 무서워 기차 화장실에 가지 않으려 했다. 이런 구조는 심각한 환경 오염을 일으켜 들판에서 낭만적인 철길 산책은 꿈에 불과하다.

기차역 주변의 환경 오염 때문에 승무원은 역마다 도착 전 30분부터 출발 후 30분까지 화장실 문을 철저하게 잠근다. 선교 초기에 이것을 잘 몰라 애들과 함께 화장실 문 앞에서 얼마나 애태웠는지 모른다. 승무원은 2인 한조로 한 명씩 교대로 근무하며 가끔 객실 내부의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틀어주기도 한다.

우크라이나 기차는 현지인의 낭만과 추억이 깃들어 있는 삶의 현장으로 자주 소설의 배경이 된다. 수도 키예프에서 출발하는 기차 안은 대부분 지방으로 내려가는 승객들로 붐빈다.  이민 가방 만 한 큰 가방이 아무리 무거워도 집으로 내려가는 그들에게는 마냥 가볍기만 한 듯 객실에서 선물 자랑으로 한참 시끄럽다. 노후된 객차이지만 20시간 이상을 타는 기차 여행은 자주 결항하는 비행기보다 더 안전하고 또 목적지에 잘 데려다 줘서 좋고, 오고 가는 길에 현지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좋다.

기차여행을 할 때마다 언제부터 객실 동승자를 잘 만날 수 있도록 ‘낯선 동침’을 위해 기도한다. 외국인으로서 현지인과 함께 매주 기차를 장시간 타는 것은 설렘과 동시에 고역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현지인들은 나 같은 동양인에 대해 반갑기 보다 곱지 않는 이질적인 태도로 대할 때도 있어 진짜 기도가 필요했다.

폐쇄 된 객실에서 서로 모르는 남녀노소 4사람이 친구 삼아 서로의 음식을 나누며 저들의 삶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의 이야기가 자장가 되어 잠에 빠져들곤 한다. 어쩌다 나에 대한 흥미라도 있으면 아시아 호기심과 세계적인 한국계 브랜드 회사에 관한 것 그리고 한한, 우우 양국 간의 경제 문화 교류까지 비정상 회담(^^)이 진행된다. 기회를 잡아 선교사인 내가 기독교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현지어가 어눌해도 모두들 귀를 쫑긋 세워 경청하고 질문도 한다. 회개하고 영접하는 날은 온 천하를 얻은 기분에 기차 여행의 피곤함이 사라진다.

4인승 칸을 드물게 혼자 만 타고 갈 때도 있다. 그 때는ㅠ  정말 신나는 시간이다. 가방에서 필요한 것을 꺼내어 동영상 시청, 성경 낭독, 노어 설교 연습, 그리고 부르짖는 기도와 찬양으로 1인 부흥회를 한다. 그래서 나와 함께하는 가방은 늘 만물상이다.

이러한 기차 여행을 매주 왕복 2,000킬로로 계산해 보면 아마도 지구 몇 바퀴를 돌았을 것이고, 만일 우크라이나 철도청의 마일리지 제도가 있었다면 수많은 공짜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기차에서 신문과 잡지를 판매하는 농아 형제들과 안부를 물을 정도로 친해졌고 객실 승무원들이 나를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4인용 객실에서 통성명 만 나눈 후 피곤하여 시트를 깔고 누우려 하자 동승자들은 음식과 보드카를 꺼내어 나에게 권한다. 긴 여행 시간 무릎이 맞닿을 만큼 좁은 객실에서 술 친구하자는 제안에 당황스럽고 피할 방법이 없어 곤란했다. 그들의 음식과 보드카 호의에 슬슬 거절하는 나를 보고 오늘 길 동무를 잘 못 만났다는 농담 섞인 말에 난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했다.

객실 밖 좁은 복도에 선채 대평원에 펼쳐지는 해바라기를 바라보며 술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제는 다 마시고 끝났겠지’생각하고 다시 객실로 돌아가니 취한 그들이 더욱 나를 반겨 주었다. 그래서 나의 신분을 밝히고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며 횡설수설한 대화에 동참하니 20시간의 여행은 더 길게 느껴졌다.

예수님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이 땅에 성육신하신 그분을 생각하니 나는 아직도 성육신적 선교와 한참 먼 선교사임이 분명하다.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순간 나는 객실에서 토하는 승객의 등을 어느새 두드려 주고 있었다.(199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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