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선교

터키 선교 이야기

관리자 0 4,064 2017.11.30 05:16
2007년 4월 18일. 터키 복음화를 위해 애쓰고 헌신하고 있는 자들, 또 골방에서 눈물로 그 땅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작년 4월 18일은 특별한 날이다. ‘말라티야’라는 터키의 지방도시에서 독일 선교사 한명과 터키현지인 사역자 두 명이 백주 대낮에 극렬 이슬람 청년들에 의해 그들의 귀한 피를 터키 땅에 쏟고 말았다. 이 사건에 세계교회는 물론 터키인들조차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형제들은 성경과 기독교에 관한 인쇄물을 제작 배포하는 일을 주로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같은 문서 선교는 터키 안에서 오랫동안 가장 효과적인 선교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터키에서 13년 동안 사역해온 정바나바 선교사의 말이다.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눠준다고 주요일간지에 광고를 내면 하루에도 여러 통의 전화주문이 들어왔어요. 그만큼 사람들이 복음에 관심이 있다는 거죠. 주문을 받아 성경을 포장하고 발송하는 그 순간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라티야에서 터키 복음화의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던 형제들이 하늘의 부름을 받은 그날, 수도 앙카라에서 사역 중이던 정바나바 선교사와 그의 부인 이에스더 선교사도 비슷한 협박전화를 받았지만 다행히 이들에게까지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다.


카르데쉬, 자궁을 함께 나눈 한국-터키
한국에서 한 지역교회의 부목사였던 정바나바 선교사는 95년 터키 선교사로 떠났다.(GP선교회 파송) 첫 해에는 언어공부와 문화적응훈련을 했고, 그 후 2년 간 앙카라의 터키대학에서 터키는 물론 비잔틴과 유럽 역사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들이 터키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는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된 것은 물론이다.

알려진 것처럼 터키인들의 조상은 과거 우리 조상들과 매우 가까웠던 돌궐민족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3-4위전에서 우리와 맞붙었던 터키를 위해 우리나라는 대형 태극기 옆에 대형 터키국기를 걸어줬고 TV를 통해서 이 장면을 지켜본 터키 사람들은 이 광경에 크게 감동 받았다고. 자국의 국기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터키인들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정 선교사는 이야기한다.

“터키인들은 한국인들을 가리켜 ‘카르데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터키 말로 ‘카르’는 ‘자궁’이란 뜻이고 ‘데쉬’는 ‘형제’를 말하는데, 결국 ‘자궁을 함께 나눈 사람들’, 매우 가까운 ‘형제’라는 뜻이죠.

이런 이야기를 터키인들과 하면 꼭 언급하는 것이 한국전쟁에 관한 것입니다. 당시 3개 여단이 한국에 파병되어 740명의 터키청년들이 피가 한국 땅에 뿌려졌거든요. 이를 두고 ‘너희 조국을 지키기 위해 터키인들이 피를 흘렸다. 우리는 혈맹이다’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정바나바 선교사와 이에스더 선교사가 13년 동안 체험한 터키선교현장은 이렇게 ‘형제애’로 충만한 곳만은 아니었다. 일부 터키 무슬림들은 이들 부부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안 후 ‘서양 기독교인들의 사주를 받고 그들에게 지원을 받아 무슬림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선교사역을 한다’고 공격했다.

결국 정 바나바 선교사는 98년 캠퍼스에서 성경배포와 선교활동 등, 교칙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학기당 6천불에 달하는 장학금을 더 이상 받지 못해 학업을 접어야만 했다. 당시 40살이 다 된  나이였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2년 간 장학금을 받아 선교사의 신분임에도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지만 장학금이 끊어진 상태에서 계속 학업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교회개척의 밑거름 되어준 문서선교
캠퍼스에서 쫓겨나왔지만 실망할 틈도 없었다. 하나님은 이들 부부에게 새로운 사역을 맡기셨다. 헌책방을 운영하던 동료 선교사가 이스탄불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그 일을 인계해준 것.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 터키 선교의 문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99년에는 길거리에서 성경을 팔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정바나바 선교사와 이에스더 선교사는 헌책방에서 성경을 파는 일을 시작했다. 지역 일간지의 광고를 통해 신약성경을 통신판매 했다. 성경만 보내주는 것은 성에 차지 않아 혼자서도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교제들을 함께 보내주고 궁금한 것은 전화로 물어볼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성경통신 공부가 이뤄졌다. 몇몇 사람들과는 관계가 깊어져 개인적으로 만나 교제도 나눴다. 그렇게 소그룹이지만 현지인들과의 연합사역도 가능하게 되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터키어 사영리 전도책자도 만들 수 있었다.

“2000년 초중반만 하더라도 한 달에 300권정도 주문이 들어왔어요. 사역이 활발하게 이뤄져서 성경발송광고와 더불어 질병이 있거나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전화로 기도해주겠다는 광고도 냈습니다. 하루에 적게는 10통, 많으면 20여 통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터키인들이 얼마나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우 조심스럽게 몇몇 사람들과는 개인적인 접촉도 했었지요.”

그러나 이러한 사역들이 2007년 터키 대선에서 강력한 이슬람으로의 회귀를 외친 압둘라 굴 대통령 후보가 터키의 제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급속도로 침체되었다.
누가 진정한 친구인가?
여러 권의 성경책을 터키 전역으로 배달하고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사람들과 전화로 교제하며 예배했지만 그들과 직접 대면하고 교제할 수 있었던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한 번은 세 명의 터키성도들에게 세례를 주고 급하게 성경학교캠프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해야만 했다. 그런데 세례를 받은 한 여인이 정바나바 선교사와 이에스더 선교사를 계속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결국 성경학교캠프까지 따라와 강의를 듣는 그녀를 이들 부부는 의아해 하다 마침내 터키 사영리를 들고 가 분명하게 복음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영접기도를 드렸다.

이에스더 선교사는 “기도를 마치자마자 그 여인이 가슴 속 응어리가 풀어져 소리 내 엉엉 울기 시작했는데 터키에서 10년 넘게 복음을 전해봤지만 그런 모습은 정말 처음이었습니다”라고 그날을 회상했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일은 한참 후에 일어났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와의 인연은 아름다운 교제 속에 계속 이어져 갔다.

“한국에 오기 전에 제가 몸이 좀 안 좋았어요. 그래서 주변의 한국 선교사님들을 통해 도움을 조금 받았습니다. 다행히 회복하고 다시 그 자매님을 만나 ‘그동안 병으로 고생했었는데 지금은 회복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자 그 분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를 찾지 않았냐’며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했다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나에게 연락을 했어야지 왜 한국 사람들에게만 도움을 청했느냐’며 서운해 하는 그 분의 모습을 보면서 누가 우리의 진정한 친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스더 선교사의 이야기다.

정바나바 선교사는 한국에 들어오기 전 한 청년무슬림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대학에서 무역을 전공하는 이 젊은이는 성경의 진리가 쿠란에도 나와 있다며 여기에 대해서 대화를 하고 싶다는 내용을 전해왔다.

“터키는 닫혀 있는 것 같지만 이렇게 대화가 가능한 나라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터키에 전해야 할, 그들은 알지도 알 수도 없는 평안을 전해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음을 느낍니다.” 세속화를 지향하던 터키정부가 강력한 이슬람주의로 돌아서면서 선교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로 터키복음화를 꿈꾸던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바나바 이에스더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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