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비밀

내 안의 비밀스런 언어

관리자 0 5,307 2017.05.09 05:52
내 안의 비밀스런 언어

태양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빛나는 시절에, 저는 생명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날의 사건, 그 느낌은 너무 확실하고 생생해서 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저는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인입니다.
교회장로와 권사직분을 가지셨던 부모님 덕택에 철부지 시절부터 교회생활을 해왔고,
 세상 학문을 접하기 전에 유년주일학교 교육부터 받았습니다.
교회 출석은 의무화되어 최소한 일주일에 서너 번은 집회에 참석해서 장로가정의 일원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타의에 의한, 순전히 강요된 신앙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자유스런 시간을 즐기는 공휴일이나 일요일에도 주로 노인들만 모여 있는 예배당으로 붙잡혀가서.
 가라사대, 하였느니라... 등등 용언의 어미가 고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앉아 있어야 하는 가련한 청춘을 상상해 보십시오!

양친으로부터 강요당하던 신앙관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던 어느 날, 저는 놀라운 영적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십대의 어느 겨울방학이었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저는 동생들과 함께 이웃교회 부흥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부흥집회가 열리고 있는 교회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마룻바닥 위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아우성 같은 찬송가를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한 할머니가 앉아있었습니다.
 저는 공교롭게도 그분의 바로 옆자리에 앉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렁찬 준비음악이 끝나고 마음 문을 열기 위한 통성기도가 시작되었을 때,
제 옆자리의 그분은 갑자기 유창한 영어(?)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 흐르듯 유연하면서도 힘찬 ‘영어기도’였습니다.
 그처럼 꾀죄죄한 의복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할머니가 말입니다.

심한 노동과 햇볕에 상한 구릿빛얼굴에는 고뇌의 깊은 주름이 가닥가닥 잡혔고, 가난에 찌든 모습하며,
영어는커녕 한국말 구사도 자유롭지 못할 것 같은 할머니였습니다.
얼마나 놀랐던지요!
또 얼마나 부러웠던지요! 기도할 생각은 않고 할머니의 기도하는 모습만 멍하니 바라보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저는 잠시 후에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방언의 은사(speak with tongues)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난하고 무식한 시골할머니 속에 내주 하신 그분(성령님)을 발견했습니다.
 성령께서 할머니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습니다.
 
그 순간 저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바로 저것이다!”
앞으로는 부모님에게 이끌려서 억지로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타의가 아닌 자의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 같은 찬란한 예감을 말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하나님께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게도 저 방언의 은사를 주십시오!
저도 이제부터는 어떤 확실한 증거를 기지고 예수를 믿고 싶습니다.
 이 할머니처럼 저도 방언으로 기도하게 해주세요! 미잇-씁니다-”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믿고 믿고 또 믿으니, 제발 저에게 이 신비하고도 매력적인 은사를 속히 주십사고!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강사목사님의 벼락 치는 설교는 자꾸만 귓전을 때리는데,
아무리 믿는다고 쇳소리를 내어도 입 속 세치 혀는 꿈적도 안했습니다.
제풀에 지쳐서 잠시 기도를 쉬는 동안에도 옆자리 성령할머니의 유창한 영어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방언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을까.
온 몸의 세포가 ‘방언’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향해 경적을 울리며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당장 그 방언이라는 희한한 언어를 선물로 받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금식기도였습니다.
금식기도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응답이 빠르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밥은 물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사흘을 견뎠습니다. 방언에 대한 열망이 공복의 쏘는 듯한 아픔을 잊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밥을 굶어가면서까지 하나님께 졸랐는데도 방언의 행적은 묘연했습니다.
삼일 째 되는 날 저는 타는 듯한 갈증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교회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사택 옆에 설치된 수돗가로 달려가서 냉수를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물을 마시고 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젠 다 틀렸구나! 방언을 받을 때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말아야하는데….
후회가 막심했지만, 그야말로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다시 예배당 뒷자리로 들어가서 힘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목이 너무 말라서 그랬으니 제발 물 마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방언기도가 어쩌고… 기운 없이 중얼중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누군가 제 등을 가볍게 툭 치며 지나갔습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혀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혀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지며 누군가가 혀끝을 안으로 세차게 잡아당기는 느낌이었습니다.

벙어리가 된 것일까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혓바닥이 자꾸 안으로 말리면서 이상한 언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그랬습니다.
부흥회 마지막 밤,
부흥회 강사님께서 교인들을 특별안수하며 지나가실 때 맨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저의 등도 살짝 치면서 지나가셨는데,
그 순간에 방언의 은사가 임했던 것입니다.
제 여린 신앙의 터닝 포인트를 찍는 순간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때부터 이 신비스런 언어는 저의 일상의 언어 사이에 절묘하게 끼어 제 신앙여정의 길잡이와 길동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눈빛처럼 깨끗하신 그분이 제 안에서, 저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십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감각해야만 믿겠다고 고집하던 제게 허락하신 신앙의 시청각교재 같은 것이었습니다.
보고 만져봐야 믿겠다고 고집하던 도마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손과 발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시던 주님은,
“네가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더 복이 있다”고 의심 많은 제자를 경책하셨지만,
저는 여전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감각하는 신앙을 고집합니다.
아무래도 증거를 가지고 믿는 자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늘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이 비밀한 언어로 그분과 대화를 나눕니다.
죄를 고백하고, 위태할 때 도움을 청하고, 사소한 일들을 부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응석도 부리고 또 사랑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삶의 고갯길을 헉헉 오르면서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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